5. 아이들은 왜 좁은 공간을 좋아할까?

물리적 공간의 크기는 종종 인간의 심리와 무관하지 않다. 특히 ‘좁은 공간’에 대한 어린 시절의 애착은 단순한 물리적 조건의 선호를 넘어서, 감정과 기억, 관계의 밀도에 기반한 깊은 심리적 구조를 내포한다. “아이들은 왜 좁은 공간을 좋아할까?”라는 질문은 단지 장난감 크기의 공간에 몸을 구겨 넣는 아이들의 습성에 대한 호기심이 아니다. 이는 ‘나만의 세계’를 만들고자 하는 욕망, 타인으로부터 잠시 분리되어 자기만의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심리적 자율성’을 찾는 여정이기도 하다.
좁은 공간은 아이에게 ‘전체 세계’다. 다락방의 낮은 천장 아래, 골목길의 굽은 모퉁이, 담장 틈의 작은 공간은 어른이 보기엔 아무 의미 없는 장소일지 몰라도, 아이의 눈에는 숨겨진 입구요, 비밀의 통로요, 모험의 시발점이다. 그들은 그 안에서 자신만의 규칙을 만들고, 소리 없는 대화를 나누고, 가상의 친구를 만나며, ‘현실 바깥’의 세계를 탐색한다. 그 공간은 보호막이자, 실험실이자, 작은 우주다.
나는 어린 시절, 집 뒤편에 있던 좁은 비탈진 골목길을 또렷이 기억한다. 그곳은 단순히 어디론가 이어지는 통로가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잠시 벗어날 수 있는 안식처였다. 그 길은 너무 좁고 가팔라서 어른들은 거의 다니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더욱 특별했다. 마치 이 세상 어딘가에 몰래 존재하는, 아이들만의 나라 같았다. 그곳에서 우리는 나뭇잎 하나로 무기를 만들고, 물고 빠진 얼음 조각으로 과학자가 되었으며, 오래된 담벼락에 그린 낙서로 화가가 되었다. 그 모든 장면은 공간이 주는 한정성과 ‘작음’이 오히려 더 많은 상상력을 자극한 결과였다.
건축은 이런 기억과 감정을 담아내는 그릇이다. 좁은 공간을 통해 우리는 자신과 타인의 경계를 실험하고, 시간의 흐름을 잊은 채 머물 수 있다. 다락방은 그 대표적인 예다. 천장이 낮아 자연스레 몸을 숙이게 되는 그 공간은, 아이의 시선에서 볼 때 ‘작아서 안전하고, 작아서 친밀하며, 작아서 소중한’ 장소다. 나 역시 다락방에 대한 기억이 강하다. 오래된 한옥의 서까래 밑에 겨우 들어갈 수 있었던 그 공간은 창문 하나 없이 어두컴컴했지만, 마음속엔 늘 밝았다. 그곳에 들어서면 외부 세계의 소음이 차단되고, 나 자신과 마주하는 조용한 시간이 흘렀다. 나무 냄새와 먼지 냄새, 햇살이 스며들 때 생기는 빛의 줄기—그 모든 것이 나에게는 감각의 경험이자, 정서의 훈련장이었다.
아이에게 좁은 공간은 선택의 자유를 회복하는 장소다. 성인은 큰 공간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지만, 아이는 가장 작은 공간에서 가장 큰 상상을 완성한다. 넓은 운동장보다 구석진 책상 밑이 더 끌리고, 고급 놀이터보다 재래시장 골목이 더 흥미로운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작은 공간은 ‘지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거기서는 누구도 우위에 서지 않는다. 어른의 시선이 닿지 않는 작은 세계는 아이에게 처음으로 주어진 독립성과 같다. 그 공간을 마주하면서 아이는 생각한다. “이건 내 공간이야. 내 마음대로 꾸며도 되는 곳이야.” 그러한 생각이야말로 공간이 주는 가장 원초적이며 강력한 감정이다. ‘나에게 속한 공간’이라는 감각은 정체성과 창조성의 뿌리가 된다.
우리는 종종 건축을 ‘크고 화려한 것’으로만 상상한다. 하지만 진정한 건축은, 오히려 작고 소박한 장소 속에서 더 깊은 감정의 층위를 생성한다. 나는 건축가로서, 때때로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 가장 오래 기억하는 공간은 어디인가요?” 대개의 대답은 의외로 소박하다. 다락방, 아파트 베란다, 할머니 집의 방 한 칸, 외할아버지의 서재 같은 곳들. 결코 넓거나 값비싼 공간이 아니다. 그 공간들은 이야기와 감정이 얽혀 있는 곳이고, 일상 속에서 특별했던 ‘시간의 응축’이 이루어진 장소들이다. 바로 그런 장소가 사람의 삶에 더 깊게 각인된다.
좁은 공간은 결국 인간관계의 밀도를 상징하기도 한다. 협소한 장소에서 나누는 대화는 더 깊고, 나란히 앉은 거리는 가까우며, 얼굴을 마주한 시간은 농밀하다. 좁은 골목길에서 마주친 이웃과의 인사는, 백화점 넓은 복도에서의 무표정한 스침보다 더 인간적이다. 한국의 오래된 마을 골목길이 가진 정서의 뿌리도 그 ‘좁음’에서 비롯되었다. 담장 너머로 들려오는 수다 소리, 대문 앞에 놓인 플라스틱 의자, 바람 따라 굴러다니는 페트병 하나에도 이야기가 있었다. 그 안에서 자란 아이들은 공간을 통해 관계를 배우고, 배려를 익히고, 자신의 위치를 확인한다.
나는 요즘 아이들이 그런 공간을 상실해가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고층 아파트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이들은 사적인 공간은 넘치지만, 모험과 발견의 ‘작은 공간’은 경험하지 못한다. 자율성과 상상력이 피어날 틈이 없는 구조다. 건축이 점점 더 기능과 규범의 시스템 속에 갇히면서, 좁은 공간이 지니던 ‘인간적인 결’이 사라지고 있다. 나는 건축가로서 때때로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지금, 누군가의 기억이 될 공간을 만들고 있는가?” 이 질문은 나를 초심으로 이끈다.
아이들이 좁은 공간을 좋아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거기엔 그들만의 세계가 있고, 마음이 놓이고,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어른이 된 우리는 때때로 그 좁은 공간을 다시 찾는다. 골목길을 돌아다니며, 다락방에 앉아 한숨 쉬며, 오래된 담장에 기대어 과거를 떠올린다. 그 순간 우리는 문득 깨닫는다. 공간은 단순한 크기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 진짜 중요한 건, 그 공간이 우리에게 어떤 ‘감정’을 주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좁은 공간은 결코 작지 않다. 그것은 기억의 입구이며, 감정의 창고이며, 상상의 성지다. 우리는 그 안에서 자랐고, 스스로를 발견했고, 누군가와 관계를 맺었다. 그러니 건축은 물리적 스케일을 넘어서, 그 안에서 살아갈 사람의 ‘심리적 공간’을 어떻게 만들어줄 것인가를 끊임없이 사유해야 한다. 좁은 공간이 주는 위로와 환대, 그리고 그 속에서 태어난 삶의 이야기들이, 지금도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조용히 이어지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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