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낯선 그 동네에 마음이 가는 이유

도시는 닮아갑니다. 어디를 가든 1층에는 프랜차이즈 카페가 있고, 그 옆에는 편의점과 똑같은 크기의 약국이 있으며, 눈에 익은 인테리어의 미용실이 보입니다. 사거리 모퉁이마다 똑같은 색깔의 파리바게뜨 간판이 있고, 거리를 밝히는 간접조명은 어느 동네든 비슷하게 반짝입니다. 익숙한 도시의 장면들. 그래서 어떤 동네를 처음 갔을 때, 우리는 이내 착각합니다. 이곳도 ‘다 똑같은’ 동네라고. 하지만 조금만 시간을 들여 걷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 동네, 묘하게 끌리네.”
건물은 비슷한데 분위기는 다릅니다. 이유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곳에는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이야기들이 쌓여 있고, 그 이야기들이 공간의 공기와 결합해 하나의 표정을 짓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간이 사람의 얼굴처럼 느껴진다면, 그 표정은 이야기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낯선 얼굴’의 인상에 끌립니다. 아는 사람이 없는데도, 낡고 정돈되지 않은 골목에 마음이 머뭅니다. 그건 시각의 문제라기보다는 감각의 문제입니다. 익숙함이 줄 수 없는 묘한 설렘이 거기 있습니다.
건축을 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종종 공간의 아름다움보다 공간이 주는 ‘느낌’에 대해 묻곤 합니다. 똑같은 외관을 가진 아파트라도 어떤 동은 무겁고, 어떤 동은 쓸쓸하고, 또 다른 동은 어딘가 유쾌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사람의 수나 색감의 차이가 아니라, 그곳을 오가며 살아가는 이들의 방식과 삶의 궤적이 공간 안에 쌓여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집 안 가득 쌓인 먼지에 주인의 손길이 묻어나는 것처럼, 동네 곳곳에는 거기에 살았던 사람들의 기억이 휘감겨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직접 보지 못해도, 무의식적으로 감지합니다.
낯선 동네에 대한 끌림은 그래서 일종의 미감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반듯하고 잘 정비된 신도시에 안정을 느끼고, 어떤 이는 낡고 조용한 골목길에 안식을 느낍니다. 후자의 경우가 내게는 더 많았습니다. 내게 낯선 동네가 매력적인 이유는, 그곳에서 ‘아직 쓰이지 않은 이야기들’이 기다리고 있는 듯한 기분을 주기 때문입니다. 오래된 가게 간판, 뜯긴 벽지 위에 덧붙여진 또 다른 종이, 담쟁이 덩굴이 오르다 만 벽면. 그 모든 것들이 말합니다. “우리는 당신에게 아직 다 말하지 않았어요.”
동네는 하나의 축적입니다. 그것은 물리적인 구성물의 총합이 아니라, 시간이 만들어낸 감정의 층위들입니다. 공간은 시간 속에서만 살아납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공간이라도, 이야기가 사라진 순간부터 그곳은 생기를 잃습니다. 반대로, 물리적으로 낡고 불편해도 거기에 이야기가 남아 있다면, 우리는 이상하리만치 그곳을 좋아하게 됩니다. 나와는 아무 인연이 없는 동네인데도, 오래된 국숫집 간판을 바라보며, 상상합니다. ‘여기에서 누군가는 오랜 시간 기다리며 국수를 먹었겠지. 누군가는 이 자리에서 마음을 다해 누군가의 말을 들어주었겠지.’
사람들은 이처럼 타인의 이야기를 상상함으로써, 자신도 모르게 공간과 관계를 맺기 시작합니다. 건축이란 본래 그런 관계를 만들어주는 도구입니다. 단지 벽을 세우고 기둥을 세우는 일이 아니라, 삶이 거주할 수 있는 이야기의 껍질을 짓는 일입니다. 그래서 나는 낯선 동네에서 느끼는 감정이야말로 가장 순수한 건축의 감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해하려 하지 않고 느끼는 것. 낯선 것이 두렵지 않고 오히려 궁금한 것. 그것은 우리가 도시를 대하는 아주 인간적인 태도입니다.
언젠가 한 부부의 집을 설계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특별히 유명한 동네를 원하지 않았고, 다만 “낮에 햇살이 드는 골목 안쪽 집”이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동네를 자주 걸어야 할 텐데, ‘느낌이 좋은 동네’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 말이 좋았습니다. 편의점이 많은 동네, 학교가 가까운 동네, 부동산에서 흔히 말하는 ‘좋은 입지’가 아니라, 느낌이 좋은 동네. 그것은 숫자로 증명되지 않고, 도면으로도 표시되지 않지만, 실제로 사람을 오래 머물게 하는 유일한 이유가 됩니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공간을 숫자와 등급으로 판단하기 시작했습니다. 상권 등급, 교육환경, 교통지수, 재건축 가능성… 그러나 동네의 ‘좋음’은 그런 계산 너머에 있습니다. 누군가를 매일 마주치고 인사할 수 있는 거리, 서로의 아이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골목, 눈 내린 날 제설차보다 먼저 이웃이 눈을 쓸어주는 길. 그런 풍경은 평가 대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시간과 사람의 관계로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동네는 쉽게 복제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외관을 따라 만들어도, 그 이야기가 없다면 공간은 낯설기만 합니다.
나는 종종 건축이 공간을 디자인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디자인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낯선 동네가 마음에 드는 이유는 결국 그곳에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관계’가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동네에서 누구를 만나게 될까? 나는 이 골목을 얼마나 자주 걷게 될까? 나는 저 벽면의 담쟁이를 보며 어떤 계절을 떠올릴까? 이런 질문들이 우리를 설레게 합니다. 익숙한 곳에선 상상하지 않던 것들이 낯선 곳에서는 열립니다. 낯섦은 그래서 일종의 가능성입니다.
당신이 지금 살고 있는 동네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나요? 혹은 당신이 매일 지나치는 거리에는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나요? 우리는 늘 익숙한 풍경을 ‘공기처럼’ 지나칩니다. 하지만 낯선 동네를 걷는 순간, 우리는 다시 묻기 시작합니다. “이 동네는 어떤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을까?” 그리고 그 순간부터, 낯선 동네는 더 이상 낯선 곳이 아닙니다. 이야기를 들으려는 마음이 있는 곳에서는 언제나 새로운 대화가 시작되니까요. 그 대화는 언어가 아니라 감각으로 시작됩니다. 건물도, 상가도, 길도 비슷하지만, 이야기는 다릅니다. 그래서 낯선 그 동네가 마음에 남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그 동네가 당신의 삶의 일부가 되었을 때, 당신도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들을지도 모릅니다. “그 동네, 묘하게 끌리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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