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서관은 언제나 저를 조용히 맞아주는 공간입니다. 도시의 소음으로부터 물러나, 말 대신 숨결이 감지되는 장소, 그곳이 바로 도서관입니다. 특히 오래된 학교를 개조한 정독도서관이나 근대기의 공간성을 품은 서초구 중앙도서관 같은 곳에서는, 단순히 책을 읽기 위한 공간을 넘어, 존재의 속도를 천천히 허락받는 느낌이 듭니다. 그것은 공간의 배려이자, 건축의 품격입니다. 이 에세이는 그런 도서관에서 경험한 감정과 건축적 인상에 대한 기록입니다.
종로 한복판, 삼청동 입구에 자리한 정독도서관은 제가 가장 자주 찾았던 도서관 중 하나입니다. 시내에서 학교를 다닌 덕에 이곳을 오랫동안 다녔습니다. 정독도서관은 1920년대에 지어진 경기고등학교 건물을 개조해 1977년 도서관으로 전환된 공간입니다. 오래된 붉은 벽돌 건물은 날이 갈수록 더 깊은 표정을 띠게 되었고, 그 안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마치 건물 자체가 나이 들어가는 과정을 함께 겪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습니다. 처음 찾았던 시기는 6학년 시절로 처음으로 도서관이라는 곳을 경험했습니다. 그게 1978년입니다. 그리고 인근에서 중학교를 다녔던 덕분에 정독도서관에서 수업 끝나고 공부를 했었습니다 .제가 다닌 학교는 수업마치면 바로 문들 닫아서... 거의 2년 가까지 수업마치면 가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니 사춘기 시절의 기억이 많을 수 밖에 없습니다. 덕분에 학교에서 정독도서관 가는 사이길은 지금도 기억이 새록 새록 날 정도입니다.
이 도서관에서 가장 인상 깊은 공간은 당시에도 지금도 중심의 계단입니다. 교실 구조를 기본으로 한 구성 속에서도 이 계단은 무게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오래된 건물 답게 항상 사람들이 다니는 소리가 들립니다. 오히려 ‘누군가 이곳을 지나고 있다’는 걸 조용히 알려주는 하나의 숨결처럼 느껴집니다. 도서관은 침묵의 공간이지만, 정독도서관의 침묵은 생명이 없는 정적이 아니라, 억제된 리듬을 가진 침묵입니다. 이 리듬은 독서의 집중을 돕고, 사색의 몰입을 유도하며, 동시에 건축이 사람의 속도를 따라 호흡하고 있음을 느끼게 합니다.
정독도서관의 창문은 작고 높습니다. 그것은 원래 학교였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 구조 덕분에 이 공간은 자연광이 충분하면서도 시선의 분산을 방지합니다. 햇빛은 오전과 오후의 시간차에 따라 창으로 들어와 서가 사이 바닥에 리듬감을 만듭니다. 저는 종종, 그런 빛의 위치를 통해 시간의 흐름을 체감합니다. 벽시계를 보지 않고도 한 시간이 지났음을 느낄 수 있는 공간. 그건 그 공간이 얼마나 섬세하게 사용자의 감각과 공명하는지를 말해줍니다.
한참 뒤에 건축된 서초동에 위치한 중앙도서관은 정독도서관보다 규모가 크고 보다 공공적 성격이 강합니다. 이 도서관은 한국의 통상 현대 건축물입니다. 좀더 명확하고 선명한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청각실, 열람실, 자료실 등이 명확히 구분되어 있습니다만 사실은 많이 아쉬운 공공건축입니다. 오히려 남산에 있었던 도서관이 더 건축적인 어휘들과 형태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964년 이해성 건축가의 작품으로 전형적인 모더니즘의 기하학적 질서가 돋보이는 우수작입니다. 지금보아도 건축적 형식에 충실하고 미학적으로도 비례감이 좋습니다. 과장된 캔틸레버의 지붕슬라브는 나름대로 한국전통건축의 특징인 지붕을 은유한 듯 하고, 층별로 돌출된 처마역할의 발코니와 노출된 기둥들은 지금 보아도 매력적입니다. 이런 어휘의 건축이 오히려 1988년 서초동 국립도서관에서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솔직히 느낌을 말하면 서초동의 국립도서관은 건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건축철학적 시각으로 들이댈 미학적 특성이 크게 드러나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80 ~ 90년대 우리나라 대부분의 관공서 건축형태를 지배했던 권위적인 구성과 배치로 도서관의 특성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그 이후에 지어진 디지털 도서관은 비록 기존 국립도서관과 형태적으로 충돌하지만 훨씬더 미학적인 측면에서 이야기 할 거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도서관의 공간은 사용자를 빠르게 움직이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필요한 책만 빌리고 나가게 만드는 것은 서점의 역할일지언정, 도서관은 오히려 목적 없는 독서를 허락해야 하는 공간입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도서관이 다양한 소통공간이면서 창의적 발상의 허브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적 흐름에 맞춰서 우리나라도 적극적으로 도서관이 바뀌고 있는데, 세종시의 국립 도서관이나 전국적으로 건축되고 있는 다양한 도서관들이 바로미터입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우리나라 도서관의 열람실은 모던한 구성 안에서도 여전히 ‘학교’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책상들이 일렬로 정렬되어 있는 구조는 과거 학창시절을 떠올릴 정도입니다. 무엇보다 이용자들 상당수가 도서관을 독서실처럼 대상화 하고, 심지어 일부 공공도서관의 건축과정에서 주민들이 독서실 기능의 요구를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정말 아쉬운 이런 요구는 우리나라 교육시스템과 관련이 있습니다. 때문에 학습실 또는 독서실 기능은 차라리 다른 건축으로 넘기고 도서관은 말그대로 일반 시민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지식의 공간으로 도서관 역할에 충실해야 합니다.
도서관이라는 공간은 결국 ‘존중’이라는 키워드로 수렴됩니다. 그것은 단순히 조용히 해달라는 질서의 강요가 아니라, 나와 당신의 속도가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정독도서관에서는 오래된 마루 바닥이 제 발걸음을 기억해주는 것 같았고, 서초 중앙도서관에서는 중정의 공기와 빛이 제 사고를 천천히 굴려주는 장치처럼 느껴졌습니다.
사람은 각자 다른 속도로 생각하고, 느끼고, 머뭅니다. 도서관은 그런 차이를 가능하게 하는 공간이어야 합니다. 더디게 이해하는 사람에게 충분한 시간이 허락되고, 우연히 만난 책 한 권에 머물 수 있도록 배려하며, 돌아갈 이유 없이도 다시 찾게 되는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 점에서 오래된 학교를 개조한 도서관은 그 자체로 깊은 은유를 담고 있습니다. 과거 학문을 익히던 공간이 오늘날 감정을 회복하고 지식을 탐색하는 장소로 전환되었다는 것. 건축은 이렇게 시간과 기능을 초월하여, 여전히 사람 곁에 머무는 법을 보여줍니다.
책을 읽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잠시 내 속도를 확인하고, 이 도시의 시간으로부터 조금 벗어나기 위해서입니다. 누군가는 쉼 없이 걸어가지만, 저는 때로 그 걷음을 멈추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도서관은 늘 조용히 그 자리에 있습니다. 이제 점점 생활과 밀접한 곳에 작은 공공 도서관들이 지어지고 있습니다. 건축가로서 조금 더 요구한다면 더 이쁜 도서관이 많아졌으면 하는 것이고, 도서관의 기능이 지역주민들의 지식 허브, 지식 플랫폼 역할을 했으면 하는 것입니다.
도서관이 중요한 도시 기능의 한 요소로 배치되는 미국의 경우는 다녀보면 종종 감동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건축을 하며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철학 중 하나는 ‘머무르고 경험하는 건축’입니다. 오래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이야말로 사람을 위하는 공간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건축안에서 경험하는 곳으로 도서관은 바로 그런 건축의 가장 이상적인 예 중 하나입니다.
책과 사람, 빛과 공간, 그리고 시간의 속도가 공존하는 도서관. 그곳에서 우리는 단순히 정보를 얻는 것이 아니라, 삶의 리듬을 재정비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다듬어진 감정은 다시 바깥세상으로 나갈 수 있는 힘이 됩니다. 도서관은, 결국 우리 마음의 작은 항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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