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시는 우리에게 말을 겁니다. 다만 우리는 그 말을 잘 듣지 않을 뿐입니다. 눈앞에 펼쳐지는 건물들의 형태, 거리의 질감, 오래된 간판의 표정, 담벼락을 타고 흐르는 담쟁이덩굴의 시간, 그리고 낮게 드리운 그림자의 속삭임까지. 이 모든 것이 도시의 언어이고, 그 자체로 우리에게 말을 건네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쁜 일상 속에서 우리는 도시의 언어를 읽을 여유를 잃어버리고, 그저 배경처럼 스쳐 지나가곤 합니다. 마치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끝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오래된 친구처럼, 도시는 우리 곁에서 묵묵히 존재합니다. 오늘도 그 자리에.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는 ‘서울’이라는 거대한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실은 ‘성북동’, ‘망원동’, ‘심청동’, ‘신당동’과 같은 작은 이름으로 우리를 부릅니다. 서울이라는 말은 너무 넓고 추상적입니다. 내 하루는 광화문이나 여의도라는 스카이라인이 아닌, 동네 편의점과 단골 빵집, 매일 걷는 골목의 이파리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사는 곳은 큰 도시가 아닌 ‘작은 도시’, 혹은 그보다 더 작은 마을 같은 도시의 조각입니다. 도시란 결국 수많은 일상이라는 점과 점이 모여 형성된 하나의 선이자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아침마다 집을 나서며 걷는 거리에는 늘 같은 가게가 있고, 같은 나무가 있고, 같은 건물이 있습니다. 그런데 유심히 보면,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제는 닫혀 있던 창문이 오늘은 열려 있고, 늘 고요하던 담장 너머로 새소리가 들려오고, 늘 바쁘게 지나치던 횡단보도 앞에서는 어떤 날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게 됩니다. 그러한 순간들이 도시와 내가 서로 마주보는 찰나입니다. 도시가 말을 걸고, 내가 그 말을 듣는 장면입니다. 그 대화는 말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색과 질감, 냄새와 온기, 빛과 그림자 같은 감각의 언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것을 읽는 일은 마치 시를 읽는 일과 닮아 있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큰 도시를 좋아하냐고 묻습니다. 높이 솟은 빌딩, 화려한 불빛, 시끄러운 교통과 인파를 상상하며 그것이 ‘도시다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살아가는 곳은 그 반대에 가깝습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는 공간, 걸어서 도달하는 거리, 가로수의 계절을 알게 되는 풍경. 그것은 작은 도시의 감각이며, 우리가 진짜로 체험하는 도시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큰 도시에 사는 것이 아니라, 큰 도시 안의 작은 도시에서 살아갑니다.”
이 작은 도시는 우리에게 감동을 줍니다. 그 감동은 드라마틱하거나 영웅적인 것이 아닙니다. 조용하고 느릿한, 그러나 진한 감정입니다. 가령 어제는 벽돌 틈새에 핀 들꽃을 보고 한참을 멈춰 있었고, 오늘은 이름 모를 노인의 인사를 받으며 따뜻한 미소를 나누었습니다. 골목 끝에 고양이가 누워 햇살을 즐기고 있고, 오래된 간판 밑에서 주름진 손이 귤을 까고 있습니다. 이런 풍경 속에서 도시는 자신의 얼굴을 조금씩 보여줍니다. 어제는 몰랐던 얼굴, 그러나 늘 그 자리에 있었던 얼굴.
기억은 그렇게 쌓입니다. 소복소복 쌓인다는 표현처럼, 눈처럼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쌓입니다. 우리가 도시를 특별하게 여기는 순간은, 사실 그 도시가 우리에게 특별한 기억을 선물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첫사랑의 흔적이 담긴 골목, 인생의 결정을 내렸던 벤치, 혼자 울었던 버스정류장… 모든 공간은 기억의 컨테이너입니다. 그리고 도시는 그러한 기억의 층위 위에 자신의 정체성을 얹습니다. 도시가 말하는 방식은, 결국 우리의 기억과 맞닿아 있습니다.
도시와 대화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습니다. 단지 조금 천천히 걷고, 조금 더 오래 바라보면 됩니다. 우리는 보통 거리를 목적지로 가는 통로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거리를 목적지로 삼는 순간, 도시의 이야기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계단 하나에도 사연이 있고, 난간 하나에도 누군가의 손길이 남아 있으며, 오래된 벽면 하나에도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느끼는 순간, 도시는 더 이상 배경이 아니라 삶의 주인공이 됩니다.
한 번쯤은, 매일 만나는 도시에게 말을 걸어보세요. “오늘은 왜 이렇게 조용하지?”, “여기 나무는 언제부터 있었지?”, “이 골목은 왜 이렇게 마음이 편할까?”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시는 그 질문에 나름의 방식으로 답을 줍니다. 대답은 말이 아니라 감정의 파장으로, 혹은 기억의 흔들림으로 돌아옵니다. 그때 우리는 도시와 연결되고, 도시 안에서 나라는 존재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결국, 도시란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생명은 없지만, 감정은 있고, 손은 없지만, 기억은 잡아줍니다. 도시를 걷는다는 것은 사실, 나를 걷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내가 쌓아온 시간, 내가 바라본 세상, 내가 느낀 감정을 다시 짚어보는 일. 그래서 도시는 언제나 거울입니다. 무심히 지나치지 말고, 한 번쯤 도시의 눈을 마주 보세요. 그 안에서 당신의 모습이, 조금 다르게, 그러나 더 깊이 반사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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