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비 오는 날, 기차역에 서서 아련함을 느낀다.
12. 비 오는 날, 기차역에 서서 아련함을 느낀다
지하철역 입구에 발을 들이밀자마자 습한 공기가 목덜미를 감싼다. 외투에 묻은 빗방울이 천천히 마르며 주변 공기와 뒤섞인다. 사람들은 제각기 우산을 접고, 머리를 한번씩 털어낸 뒤, 익숙한 듯 발걸음을 재촉한다. 그 속에서 나는 문득 멈춰선다. 특별할 것 없는 공간, 늘 지나치던 기차역이, 오늘은 왠지 모르게 낯설게 다가온다. 아니, 어쩌면 낯설기보다는 오래전 어딘가에서 느꼈던 감정 하나가, 이 물기 어린 공간을 통해 되살아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비 오는 날의 역은 일상의 틈이다. 흐린 날씨와 젖은 길,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흡수한 듯한 회색빛 구조물. 익숙한 재료들, 익숙한 디테일, 익숙한 동선.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건축은 감정을 만들지 않지만, 감정은 건축을 다시 바라보게 만든다. 마치 이미 결정된 장면 속에서, 관객이 갑자기 눈물을 흘리는 순간처럼.
기차역은 많은 것들을 담고 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떠남과 도착, 기다림과 이별, 반복되는 출근과 우연한 만남, 그리고 수많은 모르는 이들의 인생 조각을 수용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의 ‘공간’으로 감각되기 위해서는 어떤 계기가 필요하다. 비는 그런 계기가 된다. 세상의 소음을 눅눅하게 만들고, 바닥에 감정을 쏟아 붓는다. 시각보다 청각이 먼저 반응하고, 냄새보다 체온이 먼저 변한다. 그리고 그 변화는 우리가 서 있는 ‘공간’을 다르게 인식하게 만든다.
기억 속에서도, 비는 늘 특정한 장소와 함께 떠오른다. 어릴 적 좁은 골목 끝 작은 역에서 우산을 접으며 바라보던 낡은 시멘트 기둥의 차가움. 대학 시절 이별 후 돌아오던 지하철 승강장의 진한 바닥 물기. 직장인이 되어 무기력하게 돌아서던 출구 계단의 반쯤 젖은 난간. 그 모든 장소들은 그저 기능적 구조물이었지만, 그날의 감정이 스며들면서 전혀 다른 의미로 기억되었다. 건축은 감정을 담아내려 하지 않았지만, 감정은 건축을 잊지 않도록 만들었다.
우리는 종종 건축을 설명할 때 형태와 구조, 재료와 기능, 흐름과 질서를 말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건축은 경험으로 완성되는 예술이며, 그 경험은 때로 공간이 아니라 시간에 의해 정의된다. ‘그때 그 공간’이라는 문장이 생기는 순간, 건축은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라 이야기의 무대가 된다. 비 오는 날의 기차역은 그런 이야기를 가장 조용하게, 그러나 깊이 있게 들려주는 무대다.
비는 공간의 리듬을 바꾼다. 흘러가던 사람들을 느리게 만들고, 외부 세계와 내부 공간 사이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든다. 평소 같았으면 스쳐 지나쳤을 조명 하나, 표지판의 반사, 우산 너머로 번지는 형광등의 빛이 새삼스레 마음에 들어온다. 그것은 마치 그 공간이 말을 걸어오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지금 여기, 네가 있는 이곳”이라는 속삭임.
건축가로서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과연 내가 설계한 공간이, 누군가의 삶 속에서 이렇게 기억될 수 있을까? 비 오는 날, 우산을 접으며 문득 멈춰서게 만드는 장면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은 도면이나 파사드로는 그릴 수 없는 목표다. 감정은 설계할 수 없고, 기억은 통제할 수 없다. 그러나 건축이 감정을 받아들일 수 있는 빈틈을 남긴다면, 그 틈을 통해 누군가의 삶은 더 풍부해질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공간을 설계할 때, 완벽한 매끈함보다는 약간의 거칠음을 남긴다. 감정을 투영할 수 있는 표면, 흔들림을 허용하는 구석, 멈춰설 수 있는 장소. 그것은 효율의 관점에서는 불필요한 요소일 수 있다. 하지만 삶은 늘 논리와 기능의 바깥에서 시작된다. ‘쓸모없는 것’이 감정을 품고, ‘남겨진 것’이 기억을 만들어낸다. 비 오는 날의 기차역처럼.
누군가는 말한다. 건축은 변하지 않지만, 사람은 변한다고. 나는 그 말에 동의하면서도, 건축 또한 변한다고 말하고 싶다. 사람의 감정 속에서, 시간의 결 속에서, 그리고 날씨와 빛, 소리와 냄새 속에서 건축은 달라진다. 기차역의 구조는 같을지언정, 비가 오는 날이면 그 구조는 물기를 머금고, 마음속 풍경으로 전이된다. 건축이 ‘아련하다’는 말은 그런 맥락에서 가능해진다. 그것은 물리적인 구조가 아니라, 정서의 투사이자 감각의 반응이다.
결국 우리는 공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을 통해 감정을 머문다. 비 오는 날의 기차역은 그러한 감정의 정거장이다. 떠나지 않아도 좋고, 도착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잠시 멈춰, 지금 이 감정이 머무는 공간이라는 것을 느끼는 것으로 충분하다. 건축은 기억의 그릇이 되고, 비는 그 기억을 적신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안에서,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아련함이라는 이름의 감정과 마주한다.
건축은 그날을 기억하지 않지만, 우리는 그 건축을 통해 그날을 기억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비 오는 날 기차역에 서서, 아련함을 느낀다. 그것은 건축이 주는 가장 조용하고도 강렬한 위로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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