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낡고 불편한, 그러나 정감어린 옛집들
8. 낡고 불편한, 그러나 정감어린 옛집들

우리는 대부분의 삶을 편리함이라는 이름의 무채색 시스템 속에서 살아간다. 엘리베이터는 그 상징 중 하나다. 고단한 하루 끝에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원하는 층까지 데려다주는 장치는, 분명히 현대 도시생활의 축복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끔은 그런 기계적인 효율 뒤에 가려진 어떤 ‘잃어버린 감정’을 떠올리게 된다. 엘리베이터 없는 오래된 집, 낡고 비좁은 계단, 삐걱이는 문과 손잡이. 불편한데도 자꾸 생각나는 그 공간들. 나는 그런 집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 집이 다시 그리워진다.
내가 어릴 적 살았던 집은 서울의 오래된 다세대 주택이었다. 엘리베이터는 없었고, 계단은 늘 좁았으며, 철제 난간은 겨울이면 차가워 손을 대기 어려웠다. 비 오는 날이면 계단에는 흙 묻은 발자국이 그대로 찍혔고, 여름에는 누군가의 마른 빨래에서 풍기는 섬유유연제 냄새가 층계를 따라 퍼졌다. 그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나는 타인의 삶을 스쳐 지나갔다. 마치 모든 집이 조금씩 연결되어 있는 듯했다. 그 공간엔 경계가 있었지만, 담백한 온기도 있었다. 지금은 잘 찾아볼 수 없는, 층간소음 이전의 ‘층간생활’이 거기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더 높은 곳에, 더 효율적인 구조에, 더 세련된 외장재로 감싼 아파트에 살게 되었지만, 삶은 편리해진 만큼 단절되었다. 위층도 아래층도 알지 못하고, 엘리베이터 안의 거울에 비친 내 얼굴과만 마주한다. 모든 게 효율적이고 조용하며 완벽히 작동한다. 그런데 문득, ‘완벽히 작동하는’ 삶이 과연 인간적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기능과 안전, 속도와 청결. 물론 그것들은 중요하다. 그러나 건축은 그것만으로 다 설명되지 않는다. 어떤 공간은 불편함 속에 오히려 인간다움을 품는다.
낡은 집을 일부러 찾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일본 교토의 마치야, 파리의 다락방 아파트, 이탈리아 어느 시골 마을의 돌집. 그 집들은 습기 차고, 보일러가 없고, 수도가 불편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공간을 보러 간다. 아니, 경험하러 간다. 왜일까. 그것은 단순히 ‘옛것’에 대한 향수만은 아니다. 그런 공간에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시간의 질감이 있다. 새것은 반짝이지만, 오래된 것은 깊어진다. 집의 표면에 남겨진 기스 하나, 모서리에 덧댄 테이프, 수십 년간 축적된 냄새, 삐걱거리는 문에서 나는 소리. 이런 것들이 공간을 살아있게 만든다.
나는 종종 건축이 인간의 감정을 얼마나 품을 수 있는가를 고민한다. 특히 낡고 오래된 집에서. 그 안에는 우리가 잊고 사는 감정의 어휘들이 살아 있다. 불편함, 조심스러움, 기다림, 함께 나눔, 물리적 거리감의 해소. 이 모든 감정이 다세대의 비좁은 계단과 벽 하나를 사이에 둔 부엌에서 생긴다. 누군가가 부엌 문을 여는 소리, 쿵 하고 닫히는 현관문, 강아지가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 우리는 이런 사운드스케이프 안에서 자랐고, 그것은 우리에게 안전한 세계의 신호였다. 반면, 최신식 주거 공간은 ‘조용함’이라는 기준 아래 인간의 흔적을 지운다. 조용하지만 외롭다. 기능적이지만 비어 있다. 넓고 밝지만, 감정은 없다.
한 건축가는 말했다. “가장 인간적인 공간은 때로 불편한 법이다.” 이 말은 지나치게 낭만적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말이 성립하는 이유는, 우리가 기억하는 집들이 대부분 그러했기 때문이다. 나는 새벽에 물을 마시러 부엌에 갔다가 조용히 바닥을 스치는 발소리, 창문을 열 때 들려오는 삐걱거림, 계단의 모서리에서 발견한 오래된 낙서 같은 것들을 또렷이 기억한다. 그것은 기능이 아니라 서사이다. 그리고 건축은 결국 서사를 담는 그릇이다.
어느 날, 도쿄의 한 골목에서 3층짜리 오래된 주택을 본 적이 있다. 붉은 벽돌 외장에, 사선 계단이 붙어 있고, 손잡이는 녹이 슬어 있었다. 정면의 창문엔 오래된 커튼이 걸려 있었고, 그 뒤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보였다. 전혀 특별하지 않은, 그러나 잊히지 않는 장면. 나는 한참을 그 집 앞에서 서 있었다. 마치 그 집의 기억이 내 안에도 있는 듯한 착각. 그것은 아마도,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감정의 층위였을 것이다. 집이란 결국 ‘사는 곳’이 아니라 ‘살아졌던 곳’이기 때문이다.
건축은 이제 너무 ‘지나치게 작동하는 기계’가 되어가고 있다. 사용자 중심, 편의성 최우선, 에너지 효율, 시공 속도. 이런 단어들이 설계 초기부터 도면 위를 지배한다. 그런데 정작 인간은 불편함을 통해 타인을 만나고, 낯설음 속에서 기억을 쌓으며, 우연한 마찰에서 관계를 맺는다. 어쩌면 건축이 잊고 있는 건 그런 감정의 층위다. 집은 ‘사는 곳’이기 이전에 ‘살아낸 흔적’이 남는 곳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최신식 설비가 아니라, 때로는 삐걱이는 계단 하나로 충분히 가능하다.
엘리베이터 없는 집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의 공간이다. 그러나 그 기억은 앞으로의 건축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조용히 말해준다. 모두가 편리함을 선택할 때, 누군가는 여전히 이야기가 있는 공간을 그리워한다. 그런 사람들을 위한 건축이 있어야 한다. 나는 그 불편함 속에서 피어나는 인간적인 감정의 풍경을 다시 설계하고 싶다. 그 집은 오래되고 좁지만, 웃음이 있었고 시간의 켜가 있었다. 그렇게 기억되는 공간이야말로, 진짜 ‘살았던 집’이 아닐까. 그리고 우리는 그런 집에서, 진짜 삶을 살아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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